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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 필멸의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필멸의 세계에서 태어났으면 저희는..."

깜깜한 천장을 아래 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의 말이 정답이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불멸자의 세계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 한 명이 필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끝났을 관계다. 불멸의 세계가 아니었다면, 그의 말대로 그와 나는 사는 지역도, 직업도, 삶에 대한 모든 배경환경이 뒤집힌 채로 살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말이 아닌 확신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우연찮게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우리 중에 한 명이 필멸이 아니었다면, 너는 나를 끝까지 경계했을 것이며 나는 너를 끝까지 다른 불멸자와 똑같이 대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너만은 그대로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약아빠진, 아니, 여리고 여린 성격이 불멸자였어도 유지됐을 것이다. 아마 내가 불멸자였다면 성격이 더 고약해졌을지도 모르지. 내가 불멸자라면 어떨 것 같아, 하고 물었을 때 구겨질 그의 얼굴이 빤히 떠오른다. 더 최악이라고 표정을 구겼을까? 고운 표정은 나오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어쩌면, 공포에 어린 얼굴을 할지도 모르고.

'이 질문은 하지 말아야 겠군.'

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가물가물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생각의 꼬리가 물고 이어진다. 더 최악인 성격의 나. 그런데, 지금과는 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부터 약점을 내보이지 않도록 행동했고, 불멸자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에게 장막을 드러내 그 반응을 즐기고, 군대에 가고, 그 어떤 시선 속에서도 지금처럼 타격받지는 않을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치면, 시간을 넘고 넘어, 해결사를 하겠지. 이게 그나마 재밌는 일이니까? 홀로 완벽한 세계를 구축해서 그 안에서 살고, 호의적인 표정을 만들고, 어떤 때엔 표정을 드러냈다가 경멸을 받겠지. 어차피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으니, 언젠가는 도달해야할 결과다. 그렇게 되면 협업의 수는 줄어들겠군. 혼자여도 상관없다. 주위 관계가 무너져도 해결사 일을 계속한다. 해결사를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그리고, 너를 만난다.

그 어떤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던 나의 유일한 약점은 멸이 될 것이다.

"아."

혼자 누운 커다란 침대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몰려오던 잠이 순식간에 물러난다. 손으로 이마부터 턱까지 쓸어내렸다. 팔뚝을 눈 위에 올려 잠시 시야를 암전시킨다. 팔을 거둬내도 눌렸던 압력 때문인지 눈앞에 노이즈가 한참 낀다. 완전한 암전이 오기까진 적응해야한다. 즐겁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노이즈를 바라봤다. 언젠가는 사라질 노이즈다. 그럼에도 잡힐까 싶어 손을 뻗는다. 눈의 잔상을 쫓으려 허공을 허우적대는 필이라니, 웃음을 살만한 광경이다. 그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 하하하."

높낮이가 크지 않은 웃음이 건조하게 울려퍼진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남겨지지 않은 삭막한 어둠, 그 속에서 필은 드디어 찾아온 어둠을 응시한다. 참을 수 없는 웃음에 입꼬리를 올린다. 분명 어떠한 기쁨이든, 어떤 감정에서 도달했을 미소는 차갑기 그지없다.

 

아니. 멸, 네가 뭔갈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이 세상이 어떻게 되었든 나는 널 찾아냈을 거야.

아마 어떤 세상이든 쓸데없는 일로 우리는 엮였겠지.

 

어둠은 불안하다기보단 편안함까지 느껴진다. 푹신한 시트의 감촉이 어둠의 손길로까지 느껴진다. 물러났던 졸음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필의 의식을 앗아갔다. 심해 저아래로 가라앉기도 하는 것처럼 천장이 점차 멀어지고, 눈이 감겼다.

잘 자요, 필. 누군가의 속삭임이 수면 위로 들린 것만 같았다.